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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후원'의 가을풍경
글쓴이 돌쩌귀 등록일 2013-11-09
첨부파일 201311091859191.JPG 조회수 530

11.7(목) 대열동기회 여의도포럼 회원 등 13명
답사 후 안국동에서 저녁식사 - 10명 

조선이 개국되면서 고려조 수도였던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했고 경복궁이 건립되었다. 3대 태종이 등극하면서 법궁이었던 경복궁에 이어 아궁으로 창덕궁이 건립되었다. 이후 임진왜란 이후 왕들이 창덕궁을 주로 사용하여 법궁의 역할을 한 궁궐이다. 임진왜란 때에 경복궁과 창덕궁이 모두 소실되었고 이후 광해군 때에 창덕궁을 먼저 복원하여 270여년간 법궁으로 사용했고 경복궁은 고종 때에 이르러 비로소 재건되었다.       

서울에는 조선의 궁궐 5개(창덕궁, 경복궁, 덕수궁, 창경궁, 경희궁)가 남아 있다. 그 가운데 특별 유료 관람으로 창덕궁의 후원(비원)을 문화해설사의 인솔 아래 1시간 30분 동안 조선 궁궐 정원의 정수를 탐방했다. 

후원은 조선 태종 때 창덕궁이 경복궁의 행궁(行宮)으로 조성되면서 탄생했다. 창덕궁은 경복궁과 달리 건물들이 좌우대칭 일직선상에 배치되지 않았다. 인정전, 대조전을 비롯해 궐내 각사가 산세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방식으로 조성됐다. ‘한국 궁궐 건축의 비정형적 조형미’를 대표한다. 후원 역시 창덕궁의 건축 기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북악산에서 뻗어내린 산자락과 물길에 큰 변형을 가하지 않았다. 후원에 대한 인위적인 조치는 세조 때 민가 73가구를 헐어내 부지를 확대한 것이 거의 유일했다.

후원은 나랏일로 분주한 조선 군주들의 전용 휴식처로 이용됐다. 정조는 후원 역사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군주다. 즉위한 해에 후원에 2층 누각 주합루를 세웠다. 1층은 정조가 직접 지은 어제와 어필을 비롯해 왕실 도서를 보관하는 도서관으로, 2층은 열람실로 사용했다. 현재 1층에는 숙종 어필인 규장각 현판이, 2층에는 정조가 세손 시절 생활했던 경희궁 주합루의 이름을 가져다 쓴 현판이 자리해 있다.

돈화문 입구 매표소를 들어서며  

 창덕궁의 입구 돈화문  

 

 

15:00에 후원입구에서부터 해설사의 안내에 따라 1시간 30분 동안 관람   

 

나채수동기는 두 사위를 업무시간에 휴가를 내게 하여 동행했다.
요즘 시대는 아들보다는 딸들이 효도하는 시대인가 보다.
사위들이 처가에 더 가깝다.

 

 

부용정과 그 앞의 연못.
건물 배치나 토목공사 어느 것 한가지도 자연을 배려하지 않은 곳이 없다.
天地人(하늘과 땅과 사람)의 조화를 이루도록 가운데 둥그런 하늘, 그 바깥에 사각형으로 상징되는 연못을 조성하고 그 한쪽에 사람이 사용하는 정자가 조성되어 있다.    

  

불로문을 들어서서  

  

 

 

 

 

 

 

  

 

 

 

 

 

  

 

 

 

나무 나이 700년의 향나무

 

후원관람이 끝나고 다시 창덕궁 인정전부터 예전의 왕과 왕비, 그 가족들, 그리고 궁궐내 사람들의 삶의 동선을 따라 하나하나 돌아본다.
택시를 타고 '창덕궁'으로 가자고 하면 기사가 잘 모른다고 한다. 돈화문이나 비원입구를 대면 알지만 그 만큼 창덕궁 이름은 익숙되지 않았다. 이는 일제시대 일본의 의도적 역사왜곡의 결과라 할 것이다. 창덕궁을 관리하던 관청을 '비원'이라 하여 창덕궁 대신 그 관청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인접해 있는 '창경궁' 역시 동물원과 식물원을 조성하여 '창경원'으로 격하시켜 버렸다.

 

 

 

 

 

 

해시계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화재발생에 대비하여 방화수를 담는 통인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화마가 물에 비친 제모습을 보고 도망가라는 의미로 물을 담아두는 용기 '드므'이다.  

영친왕 李垠의 妃 이방자여사가 1989년 돌아가실 때까지 거처하셨다는 '낙선재'이다.

 

 

창덕궁을 나와 바깥세상에서 안의 경치가 잘 보이는 북촌8경 중의 '제1경' 포토스팟에서...

 

부근의 식당에서 박수환동기가 후원한 저녁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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